7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2023. 2. 16.

상술에 넘어간 벚나무

.

 

.

 

.

 

.

 

 

 한적한 어느 날 오후,  담영은 사뭇 진지한 얼굴로 찬장을 열고 안쪽 깊숙한 곳에 숨겨두었던 박스를 꺼내 들었다. 그 박스는 바로.. '두근두근 행복한 발렌타인을 위한 초보자도 할 수 있는 초콜릿 만들기!'라고 대문짝만하게 적혀 있는 박스였다. 사실 이 시기가 오면 어디서든 볼 수 있는 평범한 만들기 재료들의 모음이었지만, 그를 손을 이끈 결정적인 이유는 초보자도 할 수 있다는 전형적인 홍보 문구 때문이었다.

 

스스로도 제 손을 거쳐 나오는 무언가들이 참 특별하고 어디서도 볼 수 없는 형체를 갖추게 된다는 것을 알기에 그저 초콜릿을 녹여 틀에 붓고 굳히기만 하면 되는 것을 고르는 수밖에 없었다. 그라고 잘 꾸며져 있는 수제 초콜릿을 만들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나름 제 손으로 만든 것이니 수제라 할 수 있지 않나? 합리화해 볼 뿐이다.

 

'내 월하가 기뻐해 주려나?'

 

 초콜릿을 녹이려 가스 불을 켜며 든 생각이 손쓸 새도 없이 이리저리 가지를 뻗어간다. 물론 제 사랑스러운 정인은 제가 주는 것이라면 어지간하면 다 좋아할 것이라는 괴상한 확신이 있지만 선물을 준비하며 받을 사람의 반응을 상상해보는 건 준비하는 자만의 특권이니 말이다. 꽃봉오리가 트이듯 맑게 웃음 지을까. 아니면 달빛처럼 따스하게 바라봐주려나.

 

어떤 마나메라도 그저 좋기만 하지만 조금씩 다양한 반응을 보여주는 사랑하는 이의 모습은 어떻게 상상해도 질리지 않는다. 그렇게 상상 속에 빠져있다 현실로 돌아오니 어느새 검은 무언가가 되어버린 초콜릿이었던 건의 잔재가 스스로를 반겨준다. 그래.. 이게 현실이었지. 제 정인은 저와 같은 위치가 되어 돌아오고도 여전히 제게 너무 무른 면이 있으니 정말 괴상한 모양새라도 고맙다며 웃어주겠지만. 이왕이면 정말 긍정적인 의미로 놀라는 모습이 보고 싶어지는 게 어쩔 수 없는 사람 마음인지라 점점 의지가 불타오르는 담영이었다.

 

단지 녹이려 했을 뿐인데 형용할 수 없는 무언가가 되어버린 덩어리는 잠시 미뤄두고, 혹시 몰라 하나 더 사두었던 키트를 꺼내 빠르게 준비를 시작했다. 그래도 두 번째라고 전보단 빠른 속도로 귀여운 하트 모양 틀에 부어 냉장고에 넣어두고는 또다시 뻗어가는 생각을 굳이 막지는 않았다.  주로 생각하는 것은 그래, 언제나처럼 제가 사랑하는 이에 대한 것이다.

 

심장이 기분 좋게 박동한다는 걸 느끼게 해준 사람.

곁에 머물러주면 좋겠지만 그로 인해 슬퍼진다면 기꺼이 보내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

그럼에도 날 사랑한다는 걸 알기에 이기적이지만 영악하게 붙들고 싶은 사람.

 

마나메라는 한 사람을 지칭하는 수식어들이 이렇게나 많다. 제 정인도 저를 각별히 생각해주고 있다는 것은 알지만.. 어쩔 수 없이 이런저런 곳에서 질투가 이는 건 막을 수 없는 것일까. 제가 모르는 그를 아는 사람이 있다는 게 싫다. 그이의 한 조각이라도 저가 모르는 것이 있다는 게 슬프다. 처음에는 그저 이렇게 사랑스러운 이가 제 발로 내 곁에 날아와 줬다는 사실이 달가웠지만 이제는 그냥 조금 억울해지는 것이다. 사랑하는 그 사람은 성큼 다가가면 훌쩍 달아나 버릴 듯 겁먹어 있어서 그동안은 자제했던 감이 없지 않다. 그래도 천천히.. 조금씩 들을 수 있는 이야기가 많아지고, 해줄 수 있는 말들이 늘어나고는 있지만. 그래, 제 이름처럼 한없이 응석 부리며, 욕심내게만 되는 것 같다.

 

 생각이란 언제나 마음속 여기저기를 헤집고 다니기에 슬슬 정신 차려야겠다 되뇌며 냉장고 안에 넣어두었던 틀을 꺼냈다. 분명.. 하트모양이었을텐데.. 하트는 어디로 도망가고 뭔 괴상한 모양만이 남아있었다. 맛이라도 괜찮지 않을까? 하며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지만.. 도저히 삼키지 못하고 뱉어버리고 마는 담영이다. 먹는다는 행위에 적합하지 않은 덩어리를 뱉어내고는 남은 것들에게도 평온한 마지막을 선사해주었다.

 

그래.. 처음부터 이런 것에 욕심을 내면 안되었던거야.. 손때묻은 탁자 의자를 끌어다 그 위에 몸을 구겨 쪼그려 앉으며 담영은 속으로 한탄했다. 다 들어가지 못하고 삐져나온 제 발이 처량하게만 보여 괜히 눈물이 핑 돌아 눈앞이 흐렸다. 제게 하늘이라는 애칭이 어울리긴 하는 걸까. 기분이 우울해지니 별의별 생각이 다 들어 마음을 흔든다. 따지고 보면 저는 하늘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저 크기만 한 하늘빛 천이었던게 아닐까. 욕심도 많고, 멍청해서 저보다 큰 달을 품 안에 넣어보겠다 애쓰고 있었으니 말이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 보면 어느새 머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냉정한 사고를 하게 된다.  그래. 내가 높여야 하는 건 월하의 자존감이지 내 자존감이 아니다. 내 자존감은 이미 저 하늘을 찌르고 있다..!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은 자는 어떤 것도 사랑할 수 없다는 나름의 생각이란 걸 갖고 있던 담영은 정신 차리듯 제 볼을 두어 번 도닥이곤 금세 또 기운을 차리는 것이다. 단순하고 멍청하지만, 때로는 조금 멍청해야 해결되는 일들도 있으니 말이다.  시야를 흐리게 하고 있던 눈물을 대충 비벼 닦아버리고는 그의 사랑하는 이가 좋아하는 맑은 웃음을 깊게 그려 보인다. 발렌타인 그게 뭐가 중요할까! 그의 정인은 어떤 그라도 사랑해주지 못해 안달일 텐데. 생각하니 보고 싶어졌다는 단순한 사고의 흐름으로 훌쩍 일어나 우리의 보금자리로 돌아오고 있을 제 반쪽을 찾아 달려 나갔다.

 

그래! 하늘이라는 거대한 천은 저를 자르고 잘라 한 없이 작아진 달을 품에서 내놓을 생각이 없다. 

그 달도 품을 벗어나려 하지 않으니, 정말로 나름대로 행복한 한 쌍이 아닐까?

 

더보기
사담
발렌타인이지만 결국 초콜릿은 없는 괴상한 글. 부엌 정리 안하고 뛰쳐나간거라 나중에 마나메 앞에 무릎 꿇고 손들고 혼났다네요

 

'커플 연성 >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잊혀진 이를 기억해주는 자  (0) 2023.0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