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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2. 24.

잊혀진 이를 기억해주는 자

잊혀진 신x유일한 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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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짐이란 무엇인가.

 

몇백 년 전 죽은 동물 하나하나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듯

아주 어릴 적 만났던 인연의 기억이 흐릿하듯이

 

잊혀짐이란 어찌 보면 당연하고 단순한 시간의 흐름일지 모른다.

 

그럼, 이 신은 어째서 잊혔는가.

한 때, 만물이 사랑하고 경애했던 그 신이

아무도 그의 눈을 바라봐주지 않는 곳에 홀로 서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는 그런데도 너무나 많은 것들을 사랑하기에 미련으로 남아 머무른다.

마모되고 부식되어 더는 신이라 부를 수 있는 파편조차도 남지 않았지만. 누구도 그 찬란했던 나날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순간들을 견디며, 자신이 잊히게 된 이유조차도 기억하지 못하고 그저 떠도는 것이다.

 

이곳이 어디인지 왜 이곳에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늘도 □□은 움직였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다 졸 지에는 조금 속도를 빨리하여 귓가에 스치는 바람과 함께 달려 나갔다. 왁자지껄한 시장, 넓게 펼쳐있는 금색 이삭들을 뒤로 하고 달리다 보면 어느샌가 웅성거리는 말소리가 잦아들고, 고요가 그를 반긴다.

 

분명 만질 수 있고, 볼 수 있으며, 들을 수 있건만 모든 살아 숨 쉬는 것들은 그를 인식하지 못한다. 바로 앞에서 괴상한 춤을 추어도 아무런 반응도 없으니 당연한 거겠지만, 눈을 마주칠 수 있는 누군가가 없다는 것은 분명 외로운 것이라. 언제는 그럴 수 있었던 것도 아니겠지만 눈이 마주한 순간 그 대상이 저인 줄로만 착각하고, 다시 체념하게 되는 과정은 꽤 비참하기에 어느 순간 많은 것을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호, 혹시"

 

떨림이 담긴 목소리에 자연스럽게 아, 이곳의 작은 고요만큼도 내 것이 되지는 못하나 보다. 생각하게 된다. 분명 아무도 없었는데 어느샌가 객이 찾아온 모양이라 여기며 천천히 다시 한 걸음을 내딛으려는 순간

 

"저기..!"

 

저 객의 대화 상대는 어지간히도 귀가 어두운가 보다. 슬슬 알아챌 때도 되었을 텐데? 불현듯 호기심이 생겨 뻗으려던 발을 내려두고 몸을 돌려서 들려오는 소리의 근원을 바라봤다. 길게 내려온 머리칼, 꼭 마주 잡은 두 손. 이 근처에서는 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저가 올려다보는 입장이니 얼굴이 확실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본능적으로 알게 된 것이다.

 

저 사람이 바라보는 곳은 그가 가려고 했던 방향이다. 그곳엔 아무도 없건만 조금 내려간 곳을 보고 있는 시선의 방향은 변하지 않는다. 저 이가 부른 사람은 어디에 있는 걸까? 저리 간절하게 부른 이유는 무엇일까? 괜히 궁금해져 빤히 올려다보고만 있었다. 꽤 오래 이어진 정적. 다시금 고요가 잠식한 이 골목에는 분명 사람인 자가 사람인지 모르겠는 자를 바라보며 서 있다.

 

"저... 그..."

 

드디어 말을 하나? 저의 기나긴 기다림도 곧 끝이 나려나 보다. 어떤 말을 할지 이 사람들의 이야기가 끝나면 어디로 갈지 한편으로는 집중하며 한편으로는 흘리듯 듣고 있던 그 찰나에

 

"담영님.. 아니,신가요?"

 

가닥가닥 흘러내린 머리칼 사이로 그를 선명히 담고 있는 눈이 보인다. 그 누구도 아닌 □□을 담은.

눈을 마주하고, 담영 이라는 누군가의 이름과도 같은 단어를 듣는 순간 □□는 담영이 된다.

 

만물이 사랑하고 경애했던 이곳의 사람들을 수호했던 신

수많은 신도를 마치 가족과 같이 여기며 사랑했던 신

한순간 미움받아 모두에게 잊혀지고 기억 속에 묻혀버린 신

 

뜨거운 태양 아래 져버린 작은 꽃이 태양의 눈을 피한 그늘아래서 작은 싹 하나를 피워낸다.

이제 담영은 그의 이름을 불러준 사람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 사람에게 사랑을 줄 것이다.

갈 곳 잃었던 거대한 사랑이 주인을 찾았으니 사랑에 질식하지 않도록 교묘히 다가가

어느 순간 고개를 들면 황금빛 사랑에 잠겨 다른 어떤 것에도 눈을 돌리지 못하게 될 것이다.

 

어느새 훌쩍 높아진 눈높이에 어색함도 느끼지 못하고, 제 유일한 신도를 향해 훌쩍 다가간다. 그리곤 품 안에 껴안아 버린다. 저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었던 것인지. 정녕 담영을 믿는 신도인지는 모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원래 신이란 이기적이기 그지없는 존재라. 제가 마음에 든 자를 놓아줄 생각은 없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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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담

급전개 급마무리 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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